한국 쇼트트랙의 선구자 김기훈

대한민국이 1948년에 처음 출전한 동계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차지하기까지 무려 44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랜 기다림에 마침표를 찍은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의 선구자 김기훈. 그의 화려한 경력을 Olympics.com이 되돌아봤습니다.

정훈채 기자

진부한 표현이지만,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첫 걸음을 내딛는 게 어려울 뿐이지, 일단 시작하면 절반은 끝낸 거나 다름없다는 뜻인데요. 이 표현은 중요한 시험을 하루 앞두고 벼락치기 공부를 시작하는 수험생이나 마감이 코앞에 닥쳐야 연필을 깎기 시작하는 게으른 작가의 변명으로 잘못 인용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 속담은 우리나라의 동계 올림픽 도전에 제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대한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생모리츠 1948 대회에 처음 선수단을 파견했죠. 한국전쟁으로 인해 오슬로 1952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1956년 이탈리아의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열린 제7회 동계 올림픽부터는 꾸준히 대회에 출전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그런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건 한국의 11번째 도전이었던 알베르빌 1992 대회였습니다. 김윤만이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데 이어,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김기훈이 당시 세계 신기록인 1분 30초 76에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한국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겁니다.

김기훈은 남자 5000m 계주에도 마지막 주자로 출전했고, 캐나다 대표팀과 접전을 펼치던 마지막 순간에 스케이트를 앞으로 내밀며 극적인 역전승을 이끄는 명승부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이 수립한 7분 14초 02의 기록 역시 세계 신기록이었죠.

앞서 쇼트트랙이 시범 종목으로 도입되었던 캘거리 1988 대회에 출전해 남자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김기훈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1989년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3관왕에 오르며 초창기 쇼트트랙의 1인자로 자리잡은 바 있습니다.

압도적인 레이스

김기훈이 오랫동안 쇼트트랙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 그리고 부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지만, 그의 전성기가 동계 올림픽과 하계 올림픽의 개최 간격을 조정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알베르빌의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한 김기훈은 곧바로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199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남자 500m, 1000m, 1500m, 3000m 계주 등 모든 타이틀을 휩쓸며 종합 순위 1위로 5관왕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그것도 모든 종목에서 예선부터 결선까지 총 12번의 레이스를 1위로 통과하며 국제빙상연맹 (ISU) 창립 이후 처음으로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죠. 남자 선수로서는 처음이자, 1983년 캐나다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 실비 대글에 이어 두 번째로 일구어낸 업적이었습니다.

김기훈은 하계 올림픽과 시간 분리를 위해 불과 2년 후 노르웨이에서 개최된 릴레함메르 1994 대회에 출전해 1000m 올림픽 챔피언 타이틀을 방어하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올림픽 쇼트트랙 종목 2연패 역시 사상 최초의 기록이었죠.

은퇴 후의 인생

만31세였던 1998년에 스케이트를 벗은 김기훈은 2002년 한국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코치에 임명됐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안현수와 진선유가 토리노 2006 대회에서 3관왕에 오르는 역사를 썼고, 밴쿠버 2010 대회에는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죠.

그는 조국에서 열린 평창 2018 대회에서 강릉 선수촌장으로 일하며 성공적인 대회 개최에 힘을 보탰고, 지금은 울산과학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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