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 월요일 2022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홍명보 감독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독일 때 받는 감독상은 선수 시절 선수가 받는 상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상이 머릿속에 많이 있지만 감독이 돼서 감독상을 받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연합뉴스)
그건 사실입니다. 화려했던 현역 시절을 마무리하고, 여느 스타 선수들처럼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 홍명보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한축구협회 (KFA) 전임 지도자로서 청소년 대표팀을 지휘하게 된 그는 2009년 이집트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 (FIFA) U-20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8강으로 이끌면서 세계 무대에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죠.
런던의 추억
하지만 홍명보가 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 영국에서 열린 런던 2012 올림픽 대회부터였습니다. 박주영, 기성용, 구자철, 지동원, 김영권 등 오랫동안 함께 호흡을 맞춰온 선수들이 공수에 걸쳐 골고루 활약하면서 개최국 영국을 물리치고 메달권에 진입했고, 3위 결정전에서 라이벌 일본을 꺾고 마침내 동메달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결과도 중요했지만 그 과정에서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그의 '형님 리더십'이 화제가 됐고, 그렇게 뭉친 '원 팀'이 결국 선배들이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올림픽 메달'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일본을 상대로 결승골을 터뜨린 박주영 등 선수들이 영웅으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홍명보 감독도 앞으로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로 각광받기 시작했죠.
한편, 브라질 2014 FIFA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부진에 빠져있던 성인 대표팀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물러나면서 당시 전북 현대를 이끌던 최강희 감독이 예선까지만 지휘봉을 잡는 조건으로 대표팀을 이끌게 됐고, 대한민국은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누가 큰 무대에서 태극 전사들을 이끌 것인가?' 였습니다.
브라질의 악몽
그 역할을 맡게 된 홍 감독은 수 년간 조련해온 '브론즈 세대' 선수들을 이끌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냉혹했던 현실! 올림픽 무대에서는 젊은 선수들이 똘똘 뭉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지만, 세계 정상급 스타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월드컵은 차원이 다른 전쟁터였습니다. 홍명보호는 러시아와 첫 경기를 무승부로 마친 후, 알제리와 벨기에를 상대로 제대로 맞서 싸우지도 못하고 내리 패하면서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죠. 그는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듯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때의 시간은 내가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아끼는 시간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빨리 잊어버리고 싶은 '흑역사'처럼 느껴지는 그 시기를 통해, 오히려 홍명보는 감독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나 봅니다.
"브라질에서 저는 감독으로 실패했지만 그것도 제게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감독이 된 이후) 다른 시간은 대체로 좋은 시간이었지만 브라질에서는 그러지 못했죠. 그래서 그 시간을 항상 가슴 속에 넣고 지내고 있습니다."
홍명보의 길
와신상담의 시기였을까요? 짧은 휴식을 취한 그는 프로 무대로 돌아와 중국 항저우에서 지휘봉을 잡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듯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로서 행정가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언젠가 국제축구연맹이 주도한 차별반대 캠페인의 일환으로 홍명보 감독과 인터뷰를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요, 선수 시절에 혹시 차별을 겪은 적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글쎄요... 저는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또다른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차별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니냐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시선이나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주변에서 자신을 어떤 잣대로 평가하든,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든 간에 신경쓰지 않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게 홍명보의 방식입니다.
월요일 시상식 직후 '본인이 성공한 감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어떤 기준으로 갈리는지 봐야 합니다. 우승컵을 들었을 때 많은 사람이 성공이라 생각하겠지만, 내년에는 들지 못하면 그게 실패라고 따질 수 있는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합뉴스)
울산 현대의 지휘봉을 잡은 지 2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홍명보. 앞으로도 그는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게 되겠죠.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축구와 삶을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