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프레이저, 손가락 부상 속에서 따낸 금메달

1964년 10월에 열렸던 도쿄에서의 첫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도쿄 2020은 56년 전 도쿄 올림픽에서 나왔던 역사적인 순간들을 되돌아보는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그 첫 번째 시간은 조 프레이저의 헤비급 복싱 금메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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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Getty Images)

배경

조 프레이저는 복싱의 전설입니다.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헤비급에서 독보적인 세계 챔피언이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인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과의 맞대결들을 포함해 복싱 역사를 빛낸 경기들 중 상당수를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스모킹 조’, 조 프레이저의 커리어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시발점이 되어 준 올림픽 금메달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끝에 얻어낸 결과였습니다.

골든 글러브 챔피언십 승리 3회를 포함해 괜찮은 아마추어 커리어를 쌓아가던 프레이저는 1964 도쿄 올림픽 복싱 대표 선발전에서도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으로 평가되었습니다. 하지만, 결승에서 프레이저와 맞붙은 선수는19살의 버스터 마티스. 거구의 복서로 프레이저보다 거의 100파운드(약 45kg)가 많은 체중 295파운드(약 133.8kg)의 선수였습니다.

당시 프레이저는 신장 185cm였지만 몸집을 키워가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마티스를 상대로는 라이트헤비급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3라운드의 경기 동안 프레이저는 힘과 파괴력에서 마티스를 따라가지 못했고, 놀랍게도 복싱 기술에서도 마티스에게 뒤쳐졌습니다. 그 결과, 1964 도쿄 올림픽 미국 대표팀 헤비급 대표의 자리는 결국 마티스가 차지하게 됩니다.

프레이저도 예비 선수로 선수단과 함께 도쿄로 갔지만, 예비 선수는 팀 동료의 경기 참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대체 선수 역할을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운명처럼 그 '무슨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버스터 마티스가 훈련 중에 손가락 관절을 다친 것입니다.

부상으로 빠진 마티스 대신 프레이저가 대표팀에 합류했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가 알다시피 역사로 남았습니다.

영광의 순간

프레이저의 복싱 커리어에서 쉽게 이뤄낸 것은 없었습니다. 올림픽 출전도 동료의 부상이란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사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복싱만 놓고 보면 프레이저는 무시무시한 선수였고, 그에 걸맞게 올림픽 무대를 멋지게 시작했습니다. 1라운드에서 우간다의 조지 오이웰로를 만난 프레이저는 1라운드 KO승으로 경기를 마무리지었고, 8강전에서도 호주의 아돌 맥퀸을 KO로 꺾었습니다. 그러나, 맥퀸과의 경기가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맥퀸은 경기 1라운드에서 스모킹 조에게 커리어 첫 다운을 경험하게 해줬으니까요.

몇년 전의 인터뷰에서, 73세의 맥퀸은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런 선수란 걸 알았다면 절대 못 일어나게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맥퀸에게는 안타깝게도 프레이저는 일어났고 이후 일방적인 경기를 펼치며 맥퀸을 꺾었습니다.

2011년, 프레이저의 사망 후 맥퀸은 디 오스트레일리언 지에 “유일한 문제는 내가 충분히 세게 때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멀쩡하게 일어나더니 저를 두들겼고, 결국에는 끝까지 올라가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준결승. 프레이저는 소련의 강자, 바딤 예멜라노프를 만납니다. 하지만 프레이저는 언제나처럼 파괴적인 스타일로 경기를 끌어갔고, 상대가 반격할 수 없을 정도로 펀치를 퍼붓자 결국 심판이 선수의 안전을 위해 경기를 중단시키고 프레이저의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준결승에서 승리를 거두고 링 밖으로 나온 프레이저는 왼쪽 엄지에 엄청난 통증을 느낍니다. 엄지손가락 골절로 인한 통증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고, 의료진을 찾아가는 대신 손가락을 차가운 물에 넣어서 감각을 무디게 만들며 통증을 견뎠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아마추어 복싱 최고의 무대, 올림픽 헤비급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놓고 싸우게 됩니다.

결승전의 상대는 버스 정비사이자 레슬링 선수를 목표로 했던 독일의 한스 후버였습니다. 하지만 부상의 영향 때문인지 프레이저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레프트훅 사용을 피하는 모습이었고, 오른손으로만 상대를 공략해 나갔습니다. 앞선 세 경기와는 다르게 KO로 경기를 마무리짓지 못한 프레이저는 3라운드를 모두 마치고 판정을 기다려야 했고, 결국 3-2의 근소한 점수차로 프레이저의 승리가 결정되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하며 아마추어 커리어의 정상에 올라간 프레이저는 이후 6년만에 프로 무대에서 헤비급 세계챔피언 자리에 올라갑니다.

그 이후

역대 최고의 복서 중 한 명으로 올라선 프레이저에게 1964 도쿄 올림픽은 정상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이 되어줬습니다. 201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조 프레이저에 대해 미국 대표팀의 조 잰더스 감독은 “복싱의 기준을 세운 선수 중 한 명”이라 평가했으며,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그의 능력에 대해서도 “자기보다 훨씬 몸집이 크고 운동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복싱을 했지만, 조 프레이저의 심장만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 프레이저는 WBA 챔피언 지미 엘리스를 상대로 5라운드 TKO승을 이끌어내며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라갑니다. 지미 엘리스의 트레이너, 전설의 안젤로 던디가 4라운드에서 두 번의 KO를 당한 엘리스가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해 링에 올리지 않았죠.

다음 해, ‘세기의 대결’로 불렸던 무하마드 알리와의 경기에서 프레이저는 15라운드 만장일치 판정승으로 알리에게 커리어 첫 패배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1973년, 조지 포먼에게 패하기 전까지 29승 무패의 기록을 쌓아 갑니다.

복싱 역사상 가장 유명한 대결이었던 '스릴라 인 마닐라'를 포함해 알리와 두 번을 더 맞붙으며 프레이저는 복싱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1976년, 포먼에게 두 번째 패배를 당한 후 프레이저는 마침내 은퇴를 결정합니다.

하지만 1981년에 링으로 잠시 돌아와 플로이드 “점보” 커밍스와 10라운드 경기를 한 번 치르기도 했습니다.

프레이저가 이뤄낸 이 모든 영광들은 대표팀의 예비 선수로 도쿄 땅을 밟았던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4년의 인터뷰에서 그때 받은 금메달은 어떻게 했냐는 질문에 프레이저는 이런 답을 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11조각으로 잘랐습니다. 제 아이들 11명 모두에게 한 조각씩 나눠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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