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억: 마크 스피츠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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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the shadow of Mark Spitz
(Credit: © 1972 / Kishimoto/IOC)

올림픽 역사는 수많은 챔피언과 신기록, 그리고 멋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감동적인 이야기와 슬픈 기억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존재하죠. 저희는 매주 과거의 올림픽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 드리려 합니다. 이번 주는 1972년 뮌헨 올림픽 수영 남자 100m 자유형 결승전의 이야기로, 수영의 전설 마크 스피츠가 7번째 금메달을 놓칠 뻔했던 일화입니다.

(Credit: © 1972 / Kishimoto/IOC)

배경

마크 스피츠는 1972 뮌헨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따낸 선수였습니다. 이때 스피츠가 기록한 한 대회 금메달 7개는 36년이 지난 후인 2008 베이징 올림픽에 가서야 금메달 8개를 딴 마이클 펠프스에 의해서 깨어지게 됩니다.

1972년 당시 스피츠는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수 본인은 이미 금메달 6개를 목에 건 상황에서 7번째 금메달 도전이 될 100m 자유형 결승 출전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호주의 마이클 웬던에게 예선과 준결승에서 이미 졌기 때문에 결승전에서 또 지게 되면 자신의 무결점 금메달 6관왕 기록에 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죠.

4년 전의 부진 때문에 1972 뮌헨 올림픽에서 스피츠는 많은 것을 증명해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968 멕시코 올림픽에서 스피츠는 금메달 6개는 따낼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결과적으로 금메달 2개와 은메달, 동메달 1개씩에 그치며 언론의 비난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런 비난 여론들을 확실히 잠재우기 위해서 스피츠는 출전한 모든 종목 금메달이란 기록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100m 자유형에서는 웬던에게 예선과 준결승 모두 뒤쳐져 버렸기 때문에, 스피츠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반면에 호주의 웬던은 1968 멕시코 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따낸 선수로, 스피츠 정도로 부담감을 느끼는 입장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냥 수영의 전설, 스피츠와 맞대결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메달을 놓고 전설과 한 번 싸워볼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 중 한 명일 뿐이었죠.

스피츠가 출전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미국 수영팀의 코치 피터 달란드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유형 100m는 수영 최고의 종목이고 여기서 우승하는 선수는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수영 선수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과 같다는 말이었죠. 스피츠는 결국 100m 자유형 결승의 스타트라인에 섰습니다.

결승

100m 결승 출전을 결심한 스피츠는 이 결승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금빛 질주가 6관왕으로 끝나느냐, 아니면 역사를 만드느냐에 더해 자신의 명예까지도 이 한 번의 레이스에 걸려 있었으니까요. 스피츠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금메달 행진을 반드시 이어가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쟁자 웬던도 자신감에 차 있었고, 그 역시 3관왕을 노리는 입장이었죠.

그러나, 결국 결승전에서 앞서나간 것은 강력한 킥과 놀라운 스트로크 기술을 앞세운 스피츠였습니다. 웬던을 꺾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리 하이덴라이크, 소련의 블라디미르 부레까지 따돌리고 세계 신기록 51초 22를 작성하며 1위를 차지했죠. 웬던은 5위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마지막 7번째 금메달까지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스피츠는 1972 뮌헨에서 7개의 세계 신기록으로 7개의 금메달을 따낸 선수가 되었습니다.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 영원히 기억될 업적까지 세운 것입니다.

(Credit: © 1972 / Kishimoto/IOC)

그 이후

1972 뮌헨 올림픽 이후 스피츠는 22살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이후 광고 출연과 방송국에서 스포츠 해설자 역할을 맡아보기도 했죠. 그리고 1977년에는 명예 수영 선수로서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이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 선발에 도전하기 위해 잠시 수영으로 복귀했지만 올림픽 출전에는 실패합니다. 하지만 스피츠는 이미 수영에서 수많은 업적들을 달성하며 올림픽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앞으로도 그의 이름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이클 펠프스와 함께 스피츠는 수영의 미래 세대들에게 목표와 영감이 되어 주는 전설이니까요.

한편, 스피츠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관한 소문을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100m 결승에 대해 _Olympic.org_의 인터뷰 기사에서 스피츠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출전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퍼지도록 우리가 그냥 놔둔 부분도 있습니다. 다른 몇몇 코치들과 이야기를 해봤고, 그러면서 이야기가 조금 퍼져나간 것 같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웬던은 금메달 경쟁에서 스피츠를 이기지 못했지만 그 올림픽에서의 경험을 소중히 간직했고, 2년 후에는 스피츠의 스트로크 테크닉을 모방한 영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웬던은 올림픽 채널 오리지널 시리즈, '마크 스피츠의 그림자' 영상에서 “스트로크 테크닉을 따라하게 해 줘서 마크 스피츠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979년, 웬던도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에 올라갔고,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오륜기를 들고 입장한 8명의 기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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