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억: 미국 농부 vs 러시아 불곰

올림픽의 역사는 수많은 챔피언과 신기록, 그리고 멋진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기묘한 일이나 재미있는 일화, 감동적인 이야기와 슬픈 기억도 놀라울 정도로 많이 존재하죠. 저희는 매주 과거의 올림픽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시간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해 드리려 합니다. 이번 주의 이야기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그레코로만 레슬링 슈퍼헤비급 결승전입니다.

Rulon Gardner
(2003 Getty Images)

배경

전형적인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이야기입니다. 참, 다윗과 골리앗 모두 130kg가 넘는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선수들이란 점은 다르군요.

하지만 이 레슬링 결승전이 왜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이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조금 필요합니다. 두 선수 중 한 명이 그냥 ‘언더독’이었다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하니까요.

이 결승전에서 골리앗 역할은 키 193cm에 130kg가 넘는 괴물 같은 신체 조건을 가진 선수, 바로 ‘러시아 불곰’ 알렉산더 카렐린이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을 앞둔 시점에서 카렐린의 커리어 전체 전적은 887승 1패였습니다. 그리고 13년동안 무패 행진을 이어온 것에 더해 7년동안 카렐린을 상대로 단 한 점이라도 점수를 따낸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또한, 카렐린의 수상 경력에는 유럽선수권 12회 연속 우승과 세계선수권 9회 연속 우승, 3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이 포함되며 특히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결승전에서는 부상을 입은 채로 사실상 한 팔로만 싸워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이 정도면 인간이 맞나 의심될 정도였습니다. 선수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약점과 불확실성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강력한 골리앗을 상대하게 된 우리의 다윗은 와이오밍의 낙농업자로 국제 무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수, 룰런 가드너였습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가드너의 훈련은 농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몸을 만들기 위해 소를 붙잡고 씨름하는게 훈련이었죠.

그렇다면, 소와 함께 훈련해온 와이오밍의 농부에게 역대 최고의 스포츠맨 중 한 명을 꺾을 그 무언가가 과연 있었을까요?

결승전

3분 2라운드로 진행된 결승전의 1라운드에서 카렐린은 자신의 전매특허 기술, 리버스 리프트를 시도했습니다. 이 기술을 성공시키기려면 상대의 몸을 완전히 들어올려서 공중에서 비틀고, 상대가 자기 몸 아래로 가도록 해서 착지해야 합니다.

거구를 들어올린 다음에 비틀어서 던지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했기에 대부분의 레슬링 선수들은 그냥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기술이죠.

하지만 카렐린은 대부분의 레슬링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수 년 동안 이 기술을 써온 카렐린은 리버스 리프트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고, 이 기술이 들어가면 경기는 그냥 카렐린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카렐린의 신체 조건과 마찬가지로 가드너도 대단한 체격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그 거대한 체구는 카렐린이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였고, 결국 1라운드는 두 선수 모두 득점 없이 0대0으로 끝났습니다.

2라운드가 돌입하지 두 선수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로를 잡았고, 여기서 카렐린은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두 선수 모두 상대에게 팔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카렐린이 먼저 팔을 푼 것이죠.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던 규정 변경으로 인해 이 별 것 아닌 듯 한 동작은 벌점으로 인정되었고, 가드너가 1-0으로 앞서기 시작합니다.

러시아 불곰이 7년만에 처음으로 경기에서 점수를 내주고, 뒤쳐지게 되는 순간이었죠.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의 규정은 한 선수가 단 1점차의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2라운드가 모두 끝날 경우에는 연장전이 치러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도 금메달이 걸린 긴장감 넘치는 3분의 연장으로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카렐린은 연장에서도 리버스 리프트를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가드너는 버텼습니다.

경기가 끝나가는 상황에서 관중들의 눈에는 무적이라 생각되었던 러시아 불곰이 지쳐가는 듯 보였습니다. 심지어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했죠.

결국 경기는 그대로 종료되었고 룰런 가드너가 올림픽 챔피언에 등극합니다.

언더독의 승리, 골리앗을 꺾은 다윗. 그리고 세계 레슬링계의 변화.

그 이후

카렐린은 그 결승전 직후 은퇴했습니다. 매트 위에 신발을 두고 오는 것으로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죠. 반면에 가드너는 미국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다시 미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뛰었고, 4년 전의 금메달에 이어 동메달을 추가할 수 있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가드너의 커리어 최전성기였습니다. 가드너는 그 이후 스노모빌 사고, 파산 등의 일을 겪으며 힘들어했고, 이종격투기 무대로까지 진출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와이오밍 출신의 농부, 룰런 가드너의 이름은 이미 역사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는 것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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