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 살펴보는 올림픽 페어플레이의 역사

4
Nikki Hamblin helps Abbey D'Agostino to stand up
(2016 Getty Images)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결속은 전 세계가 COVID-19에 맞서기 위한 필수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선수들이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합하고 있죠.

실제로 이런 결속력은 올림픽 정신에 완벽하게 들어 맞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한 세기도 더 전에 올림픽 정신을 말했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죠. “각 개인에게 스포츠는 내면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

올림픽 무대에서 끝없이 나오고 있는 이런 놀라운 결속의 순간들은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가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공정하게

1932 로스엔젤레스에서 주디 기네스는 펜싱 금메달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엘렌 프라이스를 상대한 결승전에서 놀라운 페어 플레이 정신을 보여줬죠. 자신이 앞서가던 상황에서 심판들에게 프라이스가 성공한 두 번의 공격이 채점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점이 인정되며 기네스는 결승전에서 패하고 프라이스가 금메달을 차지합니다.

4년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상징적인 페어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는 멀리뛰기 예선 중 첫 두 번의 시도에서 모두 파울을 범해 실격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언스와 금메달을 놓고 경쟁하던 독일의 루츠 롱이 오언스에게 도움닫기를 좀 더 일찍 해서 거리를 넉넉히 두라는 조언을 해줬죠. 그 조언에 따른 오언스는 예선을 통과했고 결국 금메달을 따게 됩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뛰어 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롱이 2차세계대전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일본의 야마시타 야스히로는 유도 +95kg급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오른쪽 종아리의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도 통증을 참으며 결승까지 올라간 야스히로는 결승전에서 이집트의 모하메드 알리 라시완과 맞붙었는데요, 놀랍게도 부상을 입은 야스히로가 결승전에서 이기며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공개된 이 결승전의 뒷이야기에 따르면 부상당한 다리에 대한 공격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한 라시완이 일부러 그쪽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말 멋지네요!

함께 나누는 영광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장대높이뛰기에서는 보기 드문 상황이 나왔습니다. 일본의 니시다 슈헤이와 오에 슈에오 두 명이 똑 같은 4.25m를 뛰어넘어 공동 2위를 기록했죠. 결국 성공한 시도가 더 많았던 니시다 슈헤이가 은메달, 오에 슈에오가 동메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게 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친한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은 받은 메달을 반으로 잘라서 합쳐놓은 특별한 은-동메달을 만들었고, 나중에 이 메달은 ‘영원한 우정의 메달’로 불리게 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숀 크로퍼드도 베이징 2008에서 받은 은메달을 나눴습니다. 미국의 스프린터인 크로퍼드는 200m 결승전에서 4위를 기록했지만 2위를 기록했던 츄란디 마르티나가 레인 이탈로 실격된데 이어 3위 선수도 실격되는 바람에 은메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몇 주 후 크로퍼드는 순수한 페어플레이 정신으로 은메달을 마르티나에게 우편으로 보냈죠. 이런 쪽지와 함께: “이게 그 순간을 대체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걸 받아줬으면 해요. 제 생각에는 당신이 받는게 맞으니까.”

포기는 없다

다음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나왔던 상징적인 순간들 중 하나입니다. 400m 결승전에서 경기 도중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데릭 레드몬드는 눈물을 흘리며 트랙에 멈춰서야 했죠. 관중석에서 좌절한 아들을 본 레드몬드의 아버지는 달려들어와 아들을 부축했고, 두 사람은 결승선까지 함께 걸어갔습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지금까지 올림픽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도 1968 올림픽 마라톤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 도중 넘어져서 무릎을 심하게 다쳤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다른 주자들보다 20분이 늦었지만 고통을 참으며 완주를 해냈죠. 기자가 왜 포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5000마일이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저를 보낸 이유는 출발이 아닌 완주를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서로를 도와

때로는 아주 작은 디테일이 선수의 올림픽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50m 자유형 준결승을 준비하던 스웨덴의 수영 선수, 테레세 알스함마르가 바로 이런 경우를 경험했는데요, 운나쁘게도 경기 시작을 앞두고 수영복이 찢어지는 사고가 겪은 겁니다. 같은 종목에 출전하는 다라 토레스(금메달 후보)의 도움에도 수영복을 고칠 수 없었지만, 토레스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경기 관계자들을 설득해 시작 시간을 늦추고 알스함마르가 새로운 수영복을 입을 기회를 줬습니다. 그리고 알스함마르는 준결승에 참가할 수 있었죠.

리우 2016의 육상 5000m 경주에서는 안타깝지만 자주 볼 수 있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뉴질랜드의 니키 햄블린이 미국의 애비 디아고스티노와 충돌했고 디아고스티노가 넘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사고 직후에 자주 볼 수 없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햄블린은 경주를 멈추고 디아고스티노가 일어나도록 도왔고, 함께 결승선까지 뛰었죠. 그리고 디아고스티노는 전방십자인대와 반월판 파열의 부상을 입었지만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요트 49er급에서 덴마크 팀(요나스 워러와 마틴 키르케테르프)은 크로아티아 팀(파블 코스토프와 페타르 쿠파치)의 도움으로 금메달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파이널 레이스 시작 직전에 덴마크 팀 요트의 마스트가 부러졌고, 이미 탈락한 크로아티아 선수들이 재빨리 자신들의 요트를 준비해 덴마크 팀에게 빌려줬기 때문이었죠. 덴마크 팀은 다른 팀들보다 4분 늦게 레이스를 시작했지만 결국 7위로 파이널 레이스를 마칠 수 있었고, 이는 총점으로 금메달을 확정하기에 충분한 순위였습니다.

요트 종목에서 이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이야기는 1988 서울 올림픽에서 나온 캐나다의 로렌스 르미유 이야기입니다. 르미유는 핀급에서 치르는 총 7번의 레이스 중 5번째 레이스에서 2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싱가포르 팀이 물에 빠져서 위험한 상황을 목격하고 코스를 이탈해 두 사람을 구조했습니다. 르미유는 그 레이스에서 최하위를 기록했고, 전체 11위로 대회를 마쳤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