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체조 최초의 금메달 획득
양학선은 2012년 8월 6일 런던 노스그리니치 아레나에서 열린 남자 체조 도마 결승에서 1·2차시기 평균 16.533점을 획득,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이후 은메달 4개, 동메달 4개만을 얻었던 한국 체조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양학선은 결선 1차 시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최고 난도 7.4점의 'Yang Hak Seon(양1)'을 시도했습니다. 착지에서 두 발자국 움직였지만, 정확한 공중 동작으로 16.466점을 받았습니다. 이어 2차 시기에서는 난도 7.0점의 ‘스카라 트리플’을 완벽하게 성공하며 16.600점을 획득했습니다. 2차 시도를 끝내자마자 주변의 선수들과 코치들이 축하인사를 건넬 정도로 완벽한 퍼포먼스였습니다.
양학선은 런던 올림픽에 앞서 ‘양1,’ ‘여2,’ ‘스카라 트리플’ 세 동작을 준비했습니다. 예선에서는 양1을 제외한 나머지 둘 만 시도하며 전력을 숨겼습니다. 그럼에도 결선에서 최고 난도 7.4점을 시도한 것은 양학선뿐이었습니다. 유력한 경쟁자로 뽑혔던 프랑스의 토마 부엘과 북한의 리세광이 불참하여 적수도 없었습니다. 양학선은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미리 ‘두 발 착지 실수를 해도 다른 선수를 모두 이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여 실행에 옮겼습니다.
가족, 방황, 복귀 그리고 이사
양학선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두 살 많은 형 양학진을 따라 체조에 입문했습니다. 지도자들은 유연성이 없다고 입문을 만류하였으나 체조가 좋았던 양학선은 꾸준히 체육관에 나갔습니다. 결국, 엘리트 체조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게 된 양학선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국소년체전에서 평행봉으로 동메달을 획득합니다. 이어 6학년 때는 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광주체중에 진학한 양학선은 키가 작고 유연성이 부족한 대신 몸이 탄탄하고 탄력이 좋다는 오상봉 감독의 조언에 따라 주 종목을 평행봉에서 도마로 바꿨습니다. 오상봉 감독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옆으로 두 바퀴 반을 도는 고난도의 기술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양학선은 일주일 만에 기술을 완성하며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였습니다. 그 결과 중학교 1학년 때 전국소년체전 도마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한국 도마의 기대주로 여겨졌던 양학선에게도 슬럼프와 일탈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돈을 벌겠다며 기숙사를 탈출했었고, 고등학교1학년 때에도 다른 운동선수들과 합숙소를 이탈하였습니다. 엘리트 운동 선수들이 고된 훈련으로 숙소를 이탈하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닙니다.
양학선도 비슷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힘든 훈련과 가난이 싫어서 휴대폰을 끄고 잠적했습니다. 양학선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몸이 아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가 가사와 식당 도우미 등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고, 광주의 달동네 단칸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양학선은 그 시절을 ‘창고처럼 생긴 좁은 단칸방에 네 식구가 세 들어서 살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힘들게 생계를 유지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양학선은 돈을 벌기 위해 숙소를 이탈하곤 했습니다. 훈련이 싫어서 숙소를 빠져나와 친구 집을 전전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와 오 감독이 양학선을 붙잡았습니다. 어머니는 오 감독에게 양학선을 맡기며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운동을 그만두려는 양학선에게 어머니는 1년 안에 국가대표가 되지 않으면 운동을 그만두라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양학선은 이듬해인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방황을 끝낸 양학선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아시안게임 금메달 유망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잡아준 부모님에 대한 효심도 커졌습니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메달 유망주가 되자 장학금과 후원금으로 매달 100 만원 정도의 수입이 생겼고, 이를 어머니께 70만 원씩 송금하였습니다. 고된 훈련 속에서도 매일 2차례나 전화 통화를 할 정도였습니다.
양학선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여 부모님께 새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 이후 새집을 지었습니다.
성인무대 데뷔와 불안한 착지를 극복하는 신기술
고등학교 1학년 때 국가대표에 선발된 양학선은 이미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의 고난도 기술인 ‘여2’를 성공하며 최고 기술을 구사하였습니다. 3학년 때는 2010 아시아 주니어 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도마와 링 2관왕에 올랐습니다.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2관왕을 차지한 후 같은 해 7월 재팬컵에서 성인무대에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10월 로테르담 세계선수권에서 성인 메이저 국제 대회에 데뷔했습니다. 양학선은 메달권에 0.05점 부족한 4위를 기록했지만, 이는 아시아 선수 중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양학선 본인은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예선전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던 ‘여2’의 공중 연기를 완벽하게 펼치고도 두 차례의 시도에서 모두 불안정한 착지를 하며 감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매우 적은 점수 차이로 메달을 놓친 양학선은 약간만 실수해도 점수가 벌어지는 도마 종목에서 착지가 불안해도 우승할 수 있는 고난도 동작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어 11월에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결승전에서 1, 2차 평균 16.400점으로 15.850점을 얻은 중국의 펑저를 큰 점수 차로 누르고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12월에 열린 도요타컵에서는 다시 착지 실수로 5위에 머물렀습니다. 7.2 난도로 예상되는 신기술을 이미 개발한 상태였지만, 부상으로 인한 적은 훈련량으로는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2011년 7월 국내 초청경기인 고양 코리아컵 국제체조대회에서 최초로 신기술 ‘양1’을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10월 국제체조연맹(FIG)가 주관하는 도쿄 세계체조선수권 대회에서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며 세 바퀴를 비틀어 내리는 ‘양1’을 시도해 1차 시기에서 전 종목 최고점인 16.866점을 받으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국제체조연맹은 그 기술에 'Yang Hak Seon’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최고 난도인 7.4점으로 정식 등재하였습니다. ‘양1’은 광저우 금메달을 안긴 ‘여2’에서 반 바퀴를 더 도는 동작입니다.
당시 양학선은 “실수 없이 완벽히 착지한 선수랑 두 발을 움직인 선수가 있어요. 난도 7.4면 두 발을 움직인다고 해도 완벽히 착지한 선수를 이길 수 있는 높은 수준입니다.”라고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술로 결국 한국 최초의 체조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부상과 좌절
양학선은 2013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양1’을 앞세워 평균 15.533점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위가 15.249점이었던 만큼 준비한 ‘양2’를 선보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때의 ‘양1’은 6.4점으로, 다른 종목에 비해 도마의 점수가 높다는 국제체조연맹의 판단에 따라 2013, 2017 두 차례의 난이도 조정으로 ‘양1’은 7.4에서 6.4, 6.0점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러나 양학선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2013년 말 척추 전문 병원에 일주일 가까이 입원할 정도로 허리의 통증이 심각했습니다. 병명은 추간판탈출증, 척추협착증, 척추분리증, 1번 요추 디스크 등등이었습니다. 고난도 기술은 특성상 충분한 준비가 없다면 허리부상은 필연입니다. 공중 동작을 위해서는 체중 조절도 필수입니다. 양학선은 허리 통증에 섭생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미 몸 상태가 고난도 기술을 사용하기에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허벅지 부상으로 고생했습니다. 대회를 앞두고는 햄스트링 부상이 발발하여 컨디션을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원래 계획인 ‘양1,’ ‘양2’가 아니라 무리하지 않고 ‘여2’와 ‘스카라 트리플’을 구사하여 은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양학선도 ‘양2’의 성공률은 50%라고 했기에,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구사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양2’를 시도했으나 회전수가 부족하여 ‘스카라 트리플’이 되었습니다. 이어 10월 12일 2014 난징 세계체조선수권대회 결선에서 ‘양2’와 ‘양1’을 모두 선보였지만, 둘 다 착지 실수를 범하며 8명 중 7위에 머물렀습니다. 이로써 세계선수권대회 3연패에 실패하였고, 아시안게임에 이어 성인 무대 데뷔 이후 두 번째로 도마에서 금메달을 놓쳤습니다.
2015년 7월 양학선은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다쳤던 오른쪽 허벅지 부상으로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기권했습니다. 이어 10월에 열린 글래스고 세계선수권도 부상으로 불참했습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는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치료와 훈련을 병행했지만, 결국 리우 올림픽에 갈 수 없었습니다.
2017년 세계선수권대회 예선 1위에 오르며 부활을 알렸지만, 햄스트링 통증 재발로 결승전 직전에 기권했습니다. 이때부터 양학선은 끝났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2016년 이후 수없이 포기했다고 합니다. 몸 상태로 인해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고 잔 부상도 많아졌습니다.
복귀와 도쿄 올림픽
양학선은 이후 재활을 거쳐 2018년 10월 전국체전 금메달로 부활을 알렸습니다. 2019년 3월 14~17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FIG 종목별 월드컵과20~23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FIG 종목별 월드컵 대회에 잇달아 출전해 우승하며,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 1위 이후 6년 만에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랐습니다. 국내대회도 종별선수권, KBS배, 실업선수권, 전국 체전까지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2019년 10월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14.933점으로 예선을 1위로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결선에서는 1차 시기의 착지 실수로 8위에 머물렀습니다. 예선과 2차 시기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고유기술은 ‘양1’과 ‘양2’를 실수 없이 구사한다면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이 가능할 정도로 몸 상태가 올라왔습니다.
양학선은 2019년을 정리하는 연말 인터뷰에서 "시즌 내내 잘 뛰다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딱 한 번의 실수를 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한다"며 "올해 초만 해도 '선수 생명이 끝났다'는 얘기도 주변에서 들었는데 예전의 기량을 회복한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체조 대회가 한 번만 열렸습니다. 국제대회들은 미뤄지다가 취소되었습니다. 훈련과 실전 참가에 어려움이 있지만, 양학선은 도쿄 올림픽을 보며 운동 중입니다.
한편,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념하는 공간이 생길 예정입니다. 광주서구청은 양3동 발산마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그가 중학교 때부터 한국체대 진학 전까지 청소년기 대부분을 보냈던 세 번째 집을 활용하여 기념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입니다. 서구는 기념공간을 통해 '작은 마을 소년이 세계적 체조 영웅이 되는 스토리'를 콘텐츠로 청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줄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양학선은 런던올림픽 금메달을 비롯하여 국제대회 메달들을 같은 규격으로 제작해 기증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첫 메달인 소년체전 동메달은 실물로 기증합니다. 이에 대해 양학선은 업무 협약식에 참석하여 "첫 입상이 동메달이었을 정도로 재능은 없었다.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어린 선수들이 제가 기증한 소년체전 동메달을 보면서 '도전을 두려워 말고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두 번째 올림픽 출전을 노리는 양학선은 오는 12~13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열리는 2021년도 남자 기계체조 올림픽대표 최종선발전에 참가합니다. 18명의 참가자 중 양학선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어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