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정보
- 육상 남자 200m 결승. 1996 애틀랜타 올림픽
- 센테니얼 올림픽 스타디움, 1996년 8월 1일
배경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둔 마이클 존슨은 역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육상 200m와 400m 금메달을 한 대회에서 동시에 따낸 남자 선수는 100년의 올림픽 역사에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존슨은 이 역사적 업적 달성과 함께 지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의 악몽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존슨은 200m의 유력한 우승 후보였지만 식중독으로 인해 자신의 최고 기록에 한참 못미치는 성적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준결승에서 6위를 기록했던 존슨은 0.16초 차이로 결승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96년 8월 1일. 200m 결승전에 나선 29세의 존슨은 이미 3일 전의 400m 경주에서 43초 49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상태였습니다.
역사적 업적 달성까지 단 200m를 남겨둔 순간. 존슨은 인생 최고의 레이스를 펼쳐냅니다.
결정적인 순간
지금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업적에 도전한다는 부담감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존슨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더욱 증폭시키려는 듯한 의상을 하나 선택했습니다.
바로 신발이었죠.
존슨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빛으로 밝게 빛나는 스파이크를 신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존슨의 발에 맞춤 제작된 이 디자인은(왼발은 미국 사이즈 10.5, 오른발은 미국 사이즈 11) 그에게 “황금 신발을 신은 사나이”란 별명이 붙는 계기가 되었고, 여기에 더해 금빛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오직 금메달만을 목표로 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존슨 본인도 애틀랜타 올림픽이 끝난 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금색 신발을 신고 시상대에서 은메달을 걸고 서있는 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00m 결승 무대에는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들도 몇몇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존슨과 금메달 경쟁을 펼칠 나미비아의 프랭키 프레데릭스는 단 몇 주 전에 있었던 200m 경주에서 존슨을 꺾었던 선수이기도 했죠.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존슨은 깔끔하게 스타트를 끊었고, 100m를 10초 12의 기록으로 달리며 선두로 코너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대단했던 첫 100m에 비해 두 번째 100m는…놀라웠습니다.
2위와 수 미터 차이로 결승선을 통과한 존슨은 세계 기록을 깨뜨린 정도가 아닌, 세계 신기록을 박살내 버렸습니다.
존슨의 최종 기록은 19초 32. 이전 세계 기록을 0.3초나 앞당긴 기록이었고, 기존 기록을 0.3초나 앞당긴 신기록 작성은 200m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기록은 존슨이 후반부 100m에서 믿을 수 없는 9초 2의 기록을 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사인 볼트의 현 세계 기록 9초 58보다 약 0.3초나 더 빠른 기록이었죠.
그 이후
역사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란 호칭은 100m 챔피언에게 붙는 수식어였습니다. 하지만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영웅적인 활약 이후, 그 수식어는 마이클 존슨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엄청난 기록을 보면 믿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존슨은 200m 경주 도중에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4x100m 계주 결승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의 금메달을 따낼 기회를 아쉽게 놓친 것이죠.
4년 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존슨은 또 한번의 200m/400m 더블 달성으로 역사를 되풀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33세 12일의 나이로 400m 금메달 달성에는 성공했으나 200m 결승에서 부상을 당하며 200m 타이틀 방어에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마이클 존슨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세웠던 그 세계 기록은 12년 후에야 깨지게 됩니다. 2008년 8월 20일, 또다른 전설 우사인 볼트가 베이징 올림픽 200m 결승에서 19초 296의 기록으로 세계 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차지한 것으로요.
그러나, 존슨 이후 지금까지 올림픽에서 한 대회 200/400m 금메달 2관왕이란 업적을 달성한 선수는 아무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