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문학과 음악의 가문에 태어난 미셸린 오스테르메이어는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네 살 때 피아노 선생님인 어머니 옆에서 피아노를 쳤고, 13살 때는 연주 실력으로 파리 국립 음악원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16살 때 오스테르메이어는 2차 세계대전의 위협을 피해 잠시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형제들이 있는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하며 오스테르메이어는 스포츠에도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육상의 높이뛰기와 포환던지기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오스테르메이어에게는 육상을 하는것도 피아노를 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 손목이나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만 빼고 말입니다.
그녀에게 스포츠는 피아노 앞에서 수 시간을 보낸 후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스포츠는 재미로 했습니다. 제게는 언제나 피아노가 최우선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
오스테르메이어는 피아노와 육상 모두에서 대단한 실력을 보여줬고, 음악원의 상과 프랑스 육상 대회의 우승을 여러 번 차지해 나갑니다.
그리고 1948 런던 올림픽.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열린 1948 올림픽에는 4,104명의 참가 선수 중 여자 선수가 390명이었고, 성공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오스테르메이어는 주 종목인 포환던지기와 높이뛰기에 더해 올림픽 개막 단 몇 주를 남긴 시점에서 알게된 원반던지기 종목까지 참가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반던지기에서 결선까지 올라갔고, 41.92m의 기록으로 첫 금메달까지 목에 걸게 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스테르메이어는 프랑스 대표팀에게 자신의 우승을 축하하는 피아노 연주회를 열어 줍니다.
다음 종목인 포환던지기에서 오스테르메이어는 첫 번째 시도에서 이미 선두를 굳혀버립니다. 이후 아무도 그 기록에 근접하지 못하며 두 번째 금메달도 확정되었죠.
3일 후, 오스테르메이어의 마지막 참가 종목 높이뛰기에서는 비록 세 번째 금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1.61m를 뛰며 동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이후 1950년의 유럽 육상 선수권에서 포환던지기와 80m 허들 동메달을 추가한 오스테르메이어는 1951년에 육상에서 은퇴합니다. 이후 2001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는 풀타임 피아니스트이자 교수로 활동합니다.
오스테르메이어는 1992년에 프랑스 최고의 영예,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올림픽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올림피언들을 기념하기 위한 세계 올림피언 협회의 ‘영원한 올림피언’ 프로젝트에도 헌액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