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보드: 이상호의 영화 같은 인생

강원도 태백산 자락의 두메 산골에서 나고 자란 '배추 보이' - 한국을 대표하는 스노보더 이상호의 파란만장한 삶을 Olympics.com과 함께 들여다 보세요.

3 기사작성 정훈채
Korean snowboarder Lee Sang-Ho
(2018 Getty Images)

이상호는 영화 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강원도 정선군 출신인 이상호는 여섯 살이 되던 2001년에 공무원인 아버지가 고한읍 사무소로 발령받으면서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고한리 소두문동의 고랭지 배추밭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아들에게 스노보드를 권한 아버지 덕분에 지금의 '배추 보이'가 탄생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한때 탄광촌이었다가 지금은 대형 리조트가 들어선 이웃 마을 사북읍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던 이상호는 만 17세의 나이에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0위에 오른 데 이어, 이듬해인 2014년 FIS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평행 대회전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싱과 발레, 그리고 썰매와 스노보드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 대목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을 텐데요, 지난 2000년에 개봉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1980년대 중반 영국 북동부의 오래된 탄광촌 더럼을 배경으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자란 11세 소년 빌리가 발레 댄서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죠.

빠듯한 살림에도 아들의 방과후 복싱 수업료까지 챙겨주던 아버지 재키는 빌리가 '남성적인' 스포츠가 아닌 발레를 몰래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충격에 빠지지만, 결국 아들의 미래를 위해 노조의 파업 방침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강행하는 장면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상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보낸 아버지 이차원 씨랑은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버지의 아들 사랑은 똑같은 거 아닐까요?

두 번째 전환점은 이상호가 스물 셋 청년으로 성장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였습니다.

대회 직전에 열린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회전과 대회전 종목을 석권하며 2관왕에 올랐던 이상호는 평창 2018 평행 대회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설상 종목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습니다.

이상호는 역사적인 성과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스노보드 평행 종목은 이름 그대로 두 선수가 나란히 레이스를 펼치면서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가 승리를 거두는 경기인데요, 올림픽에서는 파란색 기문이 설치된 블루 코스와 빨간색 기문이 설치된 레드 코스를 따라서 슬로프를 내려오게 됩니다.

원래 올림픽에서는 두 가지 코스를 한 번씩 타고 내려온 다음 기록을 모두 합산해서 승자를 가리게 되지만, 평창 2018 대회에서는 악천후 때문에 일정이 밀리는 바람에 예선 성적을 기준으로 더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가 결선에서 하나의 코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경기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빨강 혹은 파랑

블루 코스와 레드 코스는 규정상 똑같은 코스로 설계되지만, 유독 평창 2018 대회에서는 레드 코스를 탄 선수들이 대부분 승리를 거두면서 레드 코스가 더 유리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선에서 3위에 오르며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한 이상호는 16강과 8강에서 모두 레드 코스를 선택한 덕분에 준결승에 올랐는데요, 예선 2위로 4강에 오른 슬로베니아의 잔 코시르가 레드 코스를 선택하면서 이상호는 다소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상호는 레이스 초반 열세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스피드로 마지막 순간에 역전에 성공하면서 0.01초 차이로 코시르를 제치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이 종목에서 메달을 확보한 이상호는 예선 1위로 결승전에 진출한 스위스의 네빈 갈마리니에 밀려 블루 코스에서 마지막 레이스를 펼쳤고 결국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공상과학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놓인 주인공 '니오'가 '레드 필'을 삼키면서 기계들에 의해 사육 당하는 인간의 현실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상호에게는 평창의 레드 코스가 역사적인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던 셈입니다.

그로부터 4년 후 열린 베이징 2022 대회에서는 이상호에게 색깔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블루 코스에서 진행된 1차 예선에서 39초96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1위에 오른 이상호는 2차 예선 레드 코스에서 40초58를 마크하면서 합계 1위로 당당히 결선 토너먼트에 올랐습니다.

상승세를 탄 이상호는 지난 대회 은메달보다 더 좋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레드 코스를 선택한 16강전에서 이탈리아의 다니엘레 바고차를 제압한 다음 8강전에서도 레드 코스를 타고 질주했지만 자신의 롤 모델이었던 ROC의 빅터 와일드와 접전 끝에 0.01초 차이로 패하면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금메달의 꿈은 좌절됐지만 이상호는 2021-22 시즌 FIS 스노보드 월드컵 평행(종합)에 이어 지난 2023-24 시즌 FIS 스노보드 월드컵 평행회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두 번째 크리스털 글로브를 거머쥐었습니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세 번째 올림픽이 될 밀라노-코르티나 2026 대회를 향한 이상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서른 살이 되는 이상호의 앞길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영화 같은 장면들이 펼쳐질까요? 더 이상 '배추 보이'라는 애칭이 어울리지 않는 청년 이상호에게, 이제 챔피언에 걸맞은 새로운 별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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