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케이시 "유진" 페어가 자신의 16번째 생일을 보름 앞두고 성인 국가 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됐을 때, 그는 무명 선수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4월에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17 여자 선수권대회 예선에 출전해 2경기에서 5골을 넣은 게 전부였거든요.
페어는 강인한 신체와 높은 골 결정력,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 덕분에 콜린 벨 국가 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무대에서 인상적인 데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태어난 유망주를 2023 국제축구연맹 여자 월드컵 대표팀에 포함시킨 벨 감독의 결정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다문화적인 배경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국가 대표로 발탁돼서 성공을 거둔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나 페어는 2023년 7월 25일 콜롬비아와의 조별 리그 1차전에서 후반전에 교체 투입되면서 성인 국가대표로 첫 경기를 치르면서 만 16세 26일의 나이에 축구계 최고의 무대인 월드컵에 출전한 역대 최연소 선수로 기록됐습니다.
모로코와의 2차전에서도 경기 막바지에 교체 선수로 들어갔던 페어는 반드시 이겨야하는 독일과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 선발 출전했습니다. 그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나면서 양 팀 모두 탈락하고 말았지만, 페어는 유럽의 강호 독일을 상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전반전 초반 문전에서 시도한 슈팅이 오른쪽 골 포스트에 맞고 나오기도 했죠.
페어는 월드컵이 끝난 후 지난 달 파주에서 기자들과 만나 "월드컵 전의 제 인생은 학교랑 축구 클럽을 왔다갔다 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렇게 큰 무대에서 뛰면서 더 많은 걸 경험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축구에서도 공격수 이외의 다른 포지션에서 뛰면서 다양한 옵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죠."
최연소 해트트릭의 주인공
태극 낭자들의 우승 도전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지만, 올해에는 중요한 목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사상 최초로 올림픽 대회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었죠.
사실 대한민국은 여자 축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애틀랜타 1996 대회 이후 단 한 번도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는데요, 지소연과 조소현이 이끄는 이른바 황금 세대의 선수들에게는 파리 2024 대회가 올림픽 무대를 밟을 마지막 기회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10월 26일 태국과의 경기에서 한국의 10-1 승리를 이끌어낸 주인공은 페어였습니다. 그는 전반 33분 선제골을 터뜨리며 성인 국가대표로서 첫 골을 넣었는데요, 만 16세 119일 만에 득점을 기록하면서 지소연에 이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어린 득점자가 된 셈이었죠.
[GOAL] 대한민국🇰🇷 7-0 🇹🇭태국
— theKFA (@theKFA) October 26, 2023
후반 21분! 케이시의 해트트릭!⚽
물 오른 케이시의 골 감각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대한민국 #여자축구국가대표팀 #파리올림픽 pic.twitter.com/1NkZjKe13I
후반전 들어 기세가 오른 페어는 두 골을 추가하며 해트트릭을 완성했는데요, 이는 한국의 남자와 여자를 통틀어 한 경기에서 세 골을 넣은 가장 어린 선수가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상승세를 이어나가면서 강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0-0 무승부를 거두고 조 1위로 올라섰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상대로 먼저 한 골을 넣고도 1-1 무승부에 그치면서 최종 예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태극 낭자들은 올림픽 본선 진출을 향한 여덟 번째 도전에서 또다시 좌절하고 말았지만, 케이시 페어처럼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다음 세대의 선수들 덕분에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됐습니다.